아스티 (Provincia di Asti)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지금의 아스티 지역과 그 주변에서 살았다. 기원전 174년 로마인에게 패배하기 전에 리구르족, 스타티엘리족이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지명은 고대 켈트어로 ‘언덕’을 의미하는 Ast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기원전 124년에 로마인들은 카스트룸 또는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했으며, 결국 하스타라는 이름의 완전한 도시로 발전했다. 기원전 89년에 이 도시는 식민지의 지위를 받았고, 기원전 49년에는 미니시피움(municipium)의 지위를 받았다. 아스티는 타나로강과 데르토나(토르토나)와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토리노)을 연결하는 플루비아 가도의 전략적 위치에 의해 선호되는 아우구스투스의 제9레기오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다른 도로들은 오늘날의 스위스와 프랑스에 대한 주요 고개에 도시를 연결했다.
도시는 서로마 제국의 몰락 동안 이탈리아를 습격한 야만인 침략의 초기 단계에서 결정적이었다. 서기 402년 초 서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메디올라눔(지금의 밀라노)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젊은 황제이자 그 도시의 거주자인 호노리우스는 약속된 지원군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갈리아의 아를시에서 안전을 위해 밀라노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호송대가 밀라노를 떠나 포강을 건넌 직후 알프스를 통과하는 그의 탈출 경로는 고딕 기병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더 많은 로마 군대가 이탈리아에 집결할 때까지 하스타 시로 긴급 피난을 가야 했다. 고트족은 라인강에서 지원군을 데려온 스틸리코 장군이 폴렌티아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한 3월까지 하스타를 포위했다. 이 첫 번째 방어에서 승리한 후, 방대한 성벽 덕분에 하스타는 서로마 제국 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를 강타한 야만인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6세기 후반에 롬바르디아가 이탈리아를 분할한 36개 공국 중 하나의 자리로 선택되었다. 아스티의 영토는 알베냐와 해안 알프스까지 뻗어 있는 넓은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북부 이탈리아가 774년에 프랑크족에 의해 백국령이라는 지위로 정복되었을 때 남아 있었다.
후기 카롤링거 시대에 아스티는 이 지역의 주요 지주인 주교의 직접 통치를 받았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우닥스(Audax, 904-926)와 브루닌구스(Bruningus, 937-966)로, 주교 자리를 카스텔 베키오(‘오래된 성’)로 옮겨 1409년까지 그곳에서 유지되었다. 아스티의 주교직은 11세기, 피에트로 2세는 하인리히 2세 황제로부터 엄청난 특권을 받았다. 세기 후반에 오토 주교는 도시를 여러 번 손상시킨 강력한 수사 백작부인 아델라이데의 목표에 저항하려 했다. 오토의 통치 기간 동안 코무네과 집정관이 처음으로 언급되어(1095년) 이 도시 국가를 유럽의 첫 번째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지도 - 아스티 (Provincia di Asti)
지도
나라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국기 |
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같은 게르만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통화 / 언어
ISO | 통화 | 상징 | 유효숫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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